목차
- 한국전쟁의 배경
- 전쟁이야기
- 부가설명
한국전쟁의 배경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의해 일본이 패함으로써 일본의 모든 식민지가 해방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해방된 한반도는 둘로 나눠지게 되는데 북위 38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일본이 미국에 패배해 항복할 조짐을 보이자 소련이 한반도의 북부를 점거해 버렸고 이에 미군은 한반도의 남쪽으로 군을 주둔시키게 된 것입니다. 미군은 냉전 중이던 소련은 한반도의 북부를 점거 후 남쪽과의 국경을 차단하고 통신을 끊어버렸습니다. 이후 남북은 서서히 분단으로 고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남쪽에서는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미국, 소련의 관계가 워낙에 안 좋았던 탓에 통일의 노력은 실패하고 되고 그 이후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의 정부가 생기게 됩니다.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소련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후 군사력을 증강시킵니다. 탱크 242대 군사 20만을 6.25 전쟁 직전까지 양성합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민주주가 갓 뿌리내린 시점이라 여러 정당이 난립하여 혼란기에 있었습니다. 군사력도 북한의 절반인 10만에 불과했고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 비해 남한의 무기 수준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김일성은 이 사실을 알고 남한침공계획을 수립하고 소련의 허가를 받기 위해 소련으로 향합니다. 소련은 남한의 주둔한 미국 때문에 북한은 침공을 허가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애치슨라인을 선언하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은 위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의 남한침공을 허가합니다. 이렇게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남한을 기습침공합니다.
전쟁이야기
미군이 철수한 뒤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불법남침을 개시합니다. 한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로지 김일성의 야욕으로 비롯된 끔찍한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때당시 남한은 많은 장병들이 휴가들 떠난 상태였고 군지휘관 인사이동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후여서 한국군은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준비한 안 된 국군을 북한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입니다. 소련에게 지원받은 탱크를 앞세워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합니다. 이후에도 국민은 숫적열세와 부족한 무기로 인해 북한의 남진을 계속하여 허용하고 결국 낙동강 방어선까지 영토를 내어주게 됩니다. 한편 미국은 북한의 불법 기습남침 정보를 입수하고 UN안보리 회의를 소집하여 연합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연합군의 상당수는 미군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의 남한이 북한에게 점령당할 경우 동북아 지역이 공산화될 것을 우려해 빠른 시간에 군을 파견하게 됩니다. 낙동강을 끼고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은 미군과 함께 군이 증원될 때까지 버텨야 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할 수 있는 큰 항구는 부산밖에 없었기에 사력을 다해 방어합니다. 방어에 성공한 국군과 연합군은 반격을 시작합니다.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은 거리는 멀고 인천의 지리적 특성상 성공확률이 아주 희박한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어려운 작전인 만큼 북한군의 허를 찌를 수 있었기에 강행합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고 국군과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이어 남한 영토전부를 수복하는 동시에 북진을 시작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중국의 북한에 대규모의 중공군을 파견합니다. 그 숫자는 30만이나 되었으니 연합군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습니다. 중국은 북한이 전쟁에 밀리자 이대로 북한이 전쟁에 패배하여 한반도가 통일되게 되면 공산국가인 중국에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중국지도자 마오쩌둥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것입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의 크게 밀리기 시작하여 후퇴를 거듭하다 다시 서울을 내주고 37도선 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이때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가 하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미군은 사기가 크게 위축돼 있었고 한국정부를 해외로 망명시키고 철수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유능한 지휘관 매튜 리지웨이가 한국의 지휘관으로 부임하였고 리지웨이는 무너진 미군의 사기를 다시 진작시키고 대반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리지웨이중장은 직접 정찰기에 타고 적진을 살피는 등 지휘관의 용맹한 행동으로 미군의 사기는 다시금 올라가게 됩니다. 보급이 부족한 중공군에게 연합군과 국군은 라운드업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대반격을 시작하였고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38도선 까지 영토를 수복하게 됩니다. 국군은 북으로 진격하길 원했으나 그러나 미군은 더 이상의 북진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전선을 확대하지 않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미군은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었던 데다 피해를 받고 있는 미국과 달리 미국의 라이벌인 소련은 이 전쟁을 틈타 무기 수출을 돈을 벌어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으로서도 무리하게 북진을 진행시킬 수 없었습니다.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이번 기회를 살려 북한을 점령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아더는 사령관에서 해임됩니다. 이후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의 소모전은 계속되었고 결국 미국과 중국은 1951년 7월 10일 첫 휴전협상이 시작됩니다. 한국은 휴전을 반대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에게 결정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휴전협정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유엔군은 원래 남한의 영토였던 개성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였으나 공산군은 이를 거부하였고 당시 개성이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여서 할 수 없이 개성을 포기하게 됩니다. 또한 포로교환 문제가 있었는데 이유는 유엔군이 잡은 공산군 포로 중에 귀환을 거부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보내지 않는다고 조건으로 모든 포로를 동시에 교환하게 되는데 이는 포로를 더 많이 잡은 유엔군으로선 아쉬운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2년간 지지부진한 휴전협상 중에도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한 상태에서 휴전을 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적진을 내려다보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에 고지를 차지하게 위해 치열한 혈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정도 선에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중공은 마지막 대공세를 퍼붇게 됩니다. 1953년 5월에 세 7월까지 15만 대군을 동원해 방어력이 약했던 강원도 쪽으로 대공세를 펼치지만 국군과 유엔군이 잘 막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게 되었습니다.
부가설명
1953년 7월 27일 남과 북은 정전협정을 체결하지만 남측 대표자 서명은 협정서에 없습니다. 남측은 끝까지 정전을 반대하고 통일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협상의 주도권이 남측에 없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승만대통령은 아주 중요한 것을 미국에 받아냅니다. 휴전하는 대신 한미상호방어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로써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유사시 한군은 미국에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휴전직후 북한에 비해 열세였던 남한은 북한의 위협에서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6.25 전쟁 중 유엔군의 사상자만 15만이 발생하였고 이 중 미군 희생자는 3만 6천 명에 달했습니다. 아무리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하더라고 동방의 작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들이 치른 숭고한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는 공업시설의 40프로 이상을 잃었고 가옥은 60만 채 이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야욕으로 인해 한반도전역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받은 것입니다. 이후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을 자신의 정적에게 돌려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기반을 더욱더 공고히 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에서 이기진 못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자유진영의 수호자란 이름을 갖게 되어 패권국가로 올라서게 되었고 한국과 가장 가까이 있던 일본은 전쟁에 군수물자를 보내는 군수창고 역할을 하게 되어 엄청난 전쟁특수를 누리게 됩니다. 중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대만을 침공해 중국통일을 달성하려는 계획에 실패하게 됩니다. 반면 소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략물자 수출로 이득만 보게 되어 중국과 북한에게 신뢰를 잃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이 애치슨라인에서 남한이 빠짐으로써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남침유도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애치슨연설을 읽어보게 되면 애치슨라인 밖에 국가가 침략을 받게 된다면 1차적으로 자국의 군이 방어를 하게 되고 그 후 유엔이 개입하게 될 것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시 유엔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이 라인밖에 국가들에 대해서는 포기한다는 내용이 결고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애치슨의 연설후반부에는 한국을 직접 언급하며 미국은 한국을 독립 주권국가로 수립시켰고 원조를 계속하기 위해 의회를 입법을 기다리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미국에 책임은 직접이라고 말합니다. 남침유도설 같은 유언비에 의해 연합군의 숭고한 희생이 더럽혀져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